조금씩 바뀌고 있다. 또한 심판 기준을 나는 디테일하게 10년 전부터 다듬고 다듬어 냈다. 3년 전부터 대구가톨릭대학교 에서 프로 작가와 심판을 양성하는 특별 교육도 시행하고 있다. 반응이 좋다. 특이하게도 40대 들만 프로작가 및 심사 강의를 듣는다. 젊은 분들이라도 반응이 있으니 기쁘다.
금년 전시회가 없으니 꽃을 꺾어 물통에 담아 올린 사진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몸은 어떻게 만들었고, 이 품종을 전략 품종으로 설정한 이유와, 어떻게 구했고 당시 몇 년생의 몇 촉이었는지? 스스로의 작품 관과 추구하는 방향과 방점을 필역한 것은 없었다.
꽃을 꺾기 전 현재의 자체 평가에 100점 만점에 몇 점인지를 분석하는 선수가 나의 제자를 제외 하면 없었다. 또 감점을 줄이려면 대한 자평하는 분들도 거의 보지 못했다. 전과는 달리 드문 드문 철사를 감지 않고 꽃을 피우는 방법은 문의는 제법 있었다. 내가 외부 강연에서 워낙 떠들어서인 것 같았다. 그나마 이게 어딘가?
그러나 앞으로는 나아질 것이다. 바뀌지 않으면 다른 나라 춘란과 무엇이 다르랴? 깊이가 얕으면 금세 말라 버리는 접시 물 일수 있어 운이 따르지 않으면 무너질 수 있다.
만약 나라면 전체 사진(대본과 감독의 역량)과 촉 마다의 잎의 장수와 길이와 폭과 잎 끝의 상태와 잎 표면의 감염도와 농약의 흔적 까지도 한 장 한 장 닦고 전시회가 없으니 출전 분으로 교채 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해서 전 과정의 스토리텔링을 해 자료로 남기고 기록으로 남길 것이다.
내가 몸담고 만들었던 여섯 개 난우회는 대충 적당히 분수만 채우며 영혼 없는 출품작과 출전을 하는 분들이 있었다. 아쉽다. 선수로 출전을 하려면 최소한 그 난이 그간(그 품종을 통한 무 감점을 향한 완성도)의 기록이라도 갈아 보려는 작은 의지 정도는 녹아 있어야 한다. 이게 없으면 보물찾기 하는 초등학교 소풍과 얼마나 차이가 있으랴?
전국대회에는 국무위원의 상훈이기 때문에 출품이 아니고 출전이다. 출전은 선수이다. 선수가 선수다워야 한다. 관객들이 볼 때 노력한 모습이 묻어나야 한다. 그게 싫으면 초청을 자제하고 가족 전이나 개인전을 해야 한다. 아쉽다.
가을 운동회에 달리는 아이가 모두 등수를 노리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달리는 시늉은 해야 한다. 성적을 노리지 않더라도 걸어가선 될까? 선수인지 관객인지 헛갈릴 정도라면 대회에 누가 될 수 있다.
사람을 초청해 치르는 큰 규모의 시합이라면 최소한 2-3년 정도는 동고동락한 사이인 작품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의 작품이 관객을 맞으려면 주연과 조연. 훌륭한 감독과 시나리오. 분야별 감독과 스텝 진. 세 가지의 틀을 그나마염두에 두고 만들었겠구나! 정도는 묻어나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대구에서 대전 부산 광주가 가깝지 않은 거리이다. 이건 예의이다. 예의를 갖추도록 시합 주최 측의 계몽도 필요하다. 아쉬움이 많다. 턱없는 정도는 정중히 사절하던지 일반부(2부) 리그를 시합날 전시장에서 구획해 구분 지어 그기에 출품을 하도록 하면 어떨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부끄럽다 여기면 내일과 내년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재료비 2-3만 원쯤 들어간 꽃꽂이 세계도 계산해서 꼽는데 우린 어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