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난계 變해야 산다
난과함께신문은 2023.5.7일 현재
19.955점의 난관련 자료를 기록보존하고 있습니다.
난과함께신문과 함께한 3.000일의 집념
난과함께신문을 창간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3,000일(8년 8일)이 되었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하는데 요즘 실감을 한다.
그동안 조회수 6.291.941건, 기사게재수 19.962건의 실적을 거양하였다. 무엇보다도 뿌듯한 것은 3.000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사를 올리는 집념을 보였으니 본인이 생각해도 경이로움을 느낀다.
전국대회가 개최된 최초 전시회는 (사)대한민국자생란협회에서 1983.3.15~3.19일 (5일간) 롯데호텔 2충애서 있었다. 준비위원장은 고 정을병 선생, 심사위원은 이작, 김기용, 이종석, 정판국, 유치경, 황상주, 정재동, 정을병 씨 였고, 대구지회 이희조 스님의 홍화 적목련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40년의 세월이 흘렸는데 대자협전시회뿐만 아니라 모든 전시회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 난과함께신문이 창간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전국대회에 보통 300~500점의 명품이 출품된다. 2일간 전시장에서 전시회가 끝나면 애란인의 기억에서 사라진다. 요즘은 전시회가 10여 군데에서 있으니 실제 작품을 다 볼 수도 없다. 애란인들이 작품을 출품하기 위하여 수년간 열과 성을 다하여 출품한 작품이 몇몇 사람들만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난과함께신문 창간이후 전국대회는 물론 지역주재기자들의 도움을 받아 부산난연합, 대구난연합, 경남난연합, 거제난연합회, 부산애란협회 전시회 등을 기록보존하고 있다. 앞으로 재정적인 형편이 허락하면 전국 모든 전시회를 기록보존하는 것이 꿈이다.
컴퓨터의 위력이 대단함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오른쪽 상단 검색란에서 한글로 검색을 하면 난과함께신문
창간일(2015.5.1) 이후에 저장된 모든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본인이 전국대회에 출품하여 동상 이상을 수상한 작품을 날짜별로 확인이 가능하다.
개별 애란인 홈페이지 역할은 물론 자료가 축적되면 난과함깨신문에서 개인전시회 개최계획을 갖고 있다.
2) 전국대회에 출품한 특징별 한국춘란을 확인할 수 있다. (예:주금소심, 홍화, 소심 등등)
3) 한국난계에서 활약하는 유명작가의 글을 볼 수 있으며 영원히 기록보존 한다. (이성보, 정계조, 이대건, 육근철, 권오경 등등)
4) 매주 3~4번 게재하는 한국춘란 명명품주간시세표를 통하여 난가격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5) 봄,가을 전국대회 대상수상작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중간 상단에 대상수상작 배너를 클릭)
6) 난과함께 후원현황을 클릭하면 창간일 이후 본인이 한 후원현황을 모두 볼 수 있다.
7) 각 중앙단체(함평, 합천 포함) 봄, 가을 전시회 동상이상 수상작을 전부 기록보존하고 있으니 단체 홈페이지를 난과함께신문이 운영해 준다고 보면 된다.
(예:함평 한국춘란난명품대제전 1.056건, (사)한국난문화협회 1.657건, (사)대한민국자생란협회 1078건 등)
“무식한 사람과 젊은 사람은 용감하다‘고 하는데 꽤나 용감하였다. 필자는 유식하지도 않지만 무식하지도 않다. 65세에 난신문을 창간하였으니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짧기 때문에 드리는 말이다.
옆에서 지켜보는 옆지기가 많이 답답하였던지 요즈음 대부분의 기업이 모두 주5일 근무하는데,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주6일 근무를 하면 좋겠다고 진언을 하지만, “알겠어요.” 한마디로 일축해버린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사를 올리는 가장 큰 이유는 하루라도 거르면 나태해져서 한국난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이 멈추어질 것 같은 위기감 때문이다.
난 신문을 창간한다고 하니 주위에 지인들이 “난으로 무슨 신문을 만드느냐”, “2개월 정도 할까, 일송이 능력이 있으니 1년은 버티겠지.” 염려와 우려가 많았다고 한다. 365일이 아니라 3.000일을 넘겼다. 혼자서 비시시 웃는다.
난과함께신문을 운영하면서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하고 어려움도 많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나가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잘한 일이 ‘금주’를 하였다는 사실이다.
담배는 40대 초반에 끊었지만 술은 평생 끊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난신문을 운영하려면 금주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애란인 여러분들의 짐작에 맡긴다.
춘란, 풍란, 한란, 새우란 등 전국대회가 열리는 곳이면 전국방방 곳곳을 누비고 다녔던 사연들이 파노라마 처럼 스친다. 교통사고로 죽을뻔 한 고비도 있었다. 천운으로 살았던 것은 조물주가 한국난역사 기록작업을 더 열심히 하라는 엄명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몇 년이나 이 일을 할지 모르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될 것같다.
일부 단체장과 애란인 중에서 한국의 난역사와 애란인의 역사를 기록보존하는 작업을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설득도 하고 이해를 시키려 노력하였지만 쉽지않아 더 이상 상대를 하지 않는다. 미래를 내다볼 줄 몰라서 그런 것으로 치부한다. 스스로 깊이 깨닫기를 바란다.
난과함께신문을 운영하면서 느낀 바가 많다. 한국난계가 나아갈 방향을 애란인 여러분과 함께 찾아보고자 한다. 일부 애란인은 한국난계가 3~5년 정도 지나면 일본처럼 수명이 다할 것이라 하지만 필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단, 변화을 끊임없이 진행하여야 가능하다. 100세 시대에 난초는 좋은 취미이고, 여가선용, 위상제고, 돈벌이를 가져다 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임이 틀림없다.
한국난역사를 기록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함께해 준 후원회원 여러분과 주두옥 지역주재기자, 김낙현 지역주재기자, 김진욱 지역주재기자에게 각별한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