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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보 칼럼> 불우한 군자의 상징과 돈
기사입력  2019/03/30 [18:49]   이성보 거제자연예술랜드 대표

 

▲ 한국춘란 무명 소심     ©김성진

 

불우한 군자의 상징과 돈

 

이상 난동으로 얼음 축제가 전면 취소되었다고 호들갑이더니, 겨울이 본때를 보여주는 것인지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춥지 않은 겨울이 어디 있던가. 꽁꽁 싸매고 봄을 기다릴 수밖에.


늘 혼자서 일하는 작업장에 친구삼아 틀어놓은 라디오에선 ‘백세인생’이란 노래가 심심찮게 들린다. 25년 세월동안 무명 가수였던 이애란의 인생을 반전시킨 이 노래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노랫말 중 ‘7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같다고 전해라’에 미소를 지었다. 내 나이 70에 할 일이 많이 남아서다.


노후 준비 부족이 우리나라 성인의 가장 큰 걱정거리라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돈 없는 노후, 그 비참함이 어떠할지는 설명이 필요치 않다.


새해 들어 세계인의 이목은 세계복권 역사상 최대 당첨금(16억 달러, 약 1조 9,000억 원)이라는 미국의 파워볼에 쏠렸다. 돈이 판치는 세상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를 일이다.


‘난과 돈’, 새해 벽두에 화두로 삼았다. 난의 상징은 돈이 아니고 ‘불우한 군자’였다. 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돈 안되고 부질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말이다.

 

난은 공자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가던 중 은곡이라는 골짜기에서 발견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외진 골짜기에서 맑은 향기를 발하는 풀 한 포기를 발견한 공자는 “너는 왕자의 향을 지녔건만 지금 홀로 피어나 다른 잡초 속에 묻혀 있느냐”라고 한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때 공자는 많은 제자를 데리고 10여년 동안 중원천하를 주유하면서 뜻을 펴려고 했지만 기회를 얻지 못했다. 무성한 잡초 사이에 피어있는 난은 범속한 필부들 틈에서 묻혀 지내는 자신의 모습이고, 맑고 높은 난향은 오랫동안 가꾸어온 자신의 학덕에 대한 자부이다.

 

그리고 누구도 맡을 수 없는 향기에 대한 아쉽고 분한 탄식은 바로 알아주지 않아 이루지 못한 자신의 포부에 대한 탄식이었다. 이때부터 난은 때를 만나지 못한 ‘불우한 군자’의 상징이 되었다.


공곡유란(空谷幽蘭)의 난이 공자의 상징이라면 《초사(楚辭)》<소요(騷擾)>에 등장하는 ‘구원란(九?蘭)’의 난은 굴원(屈原)의 상징이었다.

 

정적들의 참언으로 두 왕에게 버림받고 두 번씩이나 귀양살이를 했던 굴원은 공자가 처음 난을 보고 탄식했다는 말과 똑같은 시를 남기고 있다.

 

「난은 국토(國土)의 향으로 보통의 방초(芳草)와는 다르다. 그래서 그 충(忠)과 믿음(信)이 통하는 너희 마음으로 이로운 나라의 정사를 펼치려 했으나 겉모양의 아름다움만 쫓는 무리들은 난의 향을 알지 못해 바깥 시류만 쫓고 있다」고 한탄했다.


공자가 거문고 가락으로 남긴 난향을 굴원은 시의 운율 속에 담아냈다. 그의 장편 서정시<이소(離騷)>를 후세 사람들이《난보(蘭譜)》라고 할 정도로 그의 시에는 난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구원의 밭을 일구어 난을 기르고 난으로 띠를 만들어 차고 다니면서 난을 귀양살이의 외로운 삶을 함께하는 동반자로 표현하고 있다.


굴원의 시문학에 나타난 한(恨)의 상징은 시대를 초월하여 송말의 화가 정사초(鄭思肖)의 묵란화로 이어졌다. 정사초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몽고라는 이민족에게 국토를 잃은 송조(宋朝)의 유민으로서 평생 한을 안고 살아간 화가이다.

 

나라 전체가 굴원의 유배지와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는 송나라 황제의 성인 趙(肖)를 생각(思)한다는 뜻으로 사초라 개명하고 땅이 없어 뿌리를 내리지 못한 ‘노근묵란도(露根墨蘭圖)’를 그렸다.

 

불우한 군자를 상징한 난은 굴원의 시에, 정사초의 회화로 한의 계보를 그리면서 동북아 전역으로 번졌다. 굴원의 시와 정사초의 그림은 한(恨)의 문화가 강했던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다.


한국의 묵란사(墨蘭史)는 난의 상징으로 엮어진 한의 문화사이다. 유배지 생활에서 묵란의 걸작을 탄생시킨 조희룡(趙熙龍)은 ‘붓을 휘둘러 먹이 빗발처럼 튀고, 돌은 흐트러진 구름처럼, 난은 엎어진 풀처럼 그려낸다’ 고 토로했다.

 

상갓집 개라는 소리를 들으며 파락호 생활을 했던 시절, 석파 이하응(李昰應·대원군)은 난은 치는 것으로 한을 달랬고,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였던 민영익(閔泳翊)은 나라 잃은 망명객으로 상해에 거처하면서 정사초처럼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노근란(露根蘭)을 많이 그려 묵란화의 대가가 되었다.

 

식물의 정체성도 재배식물로서 공곡과는 거리가 먼 오늘의 난들은 거의 그 상징성을 상실하고 있는 현실이다.


난은 이제 산업으로서의 가치가 상징적 가치보다 우위에 있고 더 중시되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일본의 상황을 타산지석으로 여기며 안타깝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모르긴 하나 산업적 가치, 즉 돈이 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을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성인(聖人)도 여세출(與世出)이라 하지 않던가. 그렇긴 하나 애란인이라면 선인들이 새겼던 ‘불우한 군자’ 라는 상징을 헤아렸으면 한다. 난문화가 오랜 세월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봄을 기다리기엔 겨울이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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