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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보 칼럼> 이끼와 방하착(放下着)
기사입력  2019/04/14 [06:29]   이성보 거제자연예술랜드 원장

 인터넷蘭신문 '난과함께'는 한국의 역사와

애란인의 역사를 기록 보존합니다.

 

▲ 풍란 두엽에 홍화 '서현'     ©일송 김성진

 

이끼와 방하착(放下着)

 

봄을 재촉하는 비가 잦다. 비를 맞으면 바위에 붙은 이끼가 파랗게 살아난다. 메말라 성글어 모양이 말씀이 아니었으나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생기가 넘친다. 청태(靑苔). 푸를 청()자가 들어간 말 중에는 좋은 뜻을 지닌 말이 많다. 청춘(靑春)이니 청산(靑山) 등 듣기만 하여도 싱그럽다.

 

나는 이들 못지않게 청태를 좋아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시간 공들여 제작하고 있는 작품들이 이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미니장가계, 석부작, 석분작, 실생산수화, 원경 작품 등 하나같이 이끼가 없으면 되지 않는다.

 

며칠 전엔 십수 년 전에 내가 살고 있는 동부면사무소의 민원실을 겸한 사무실에 만들어준 대형 분경을 손보아주었다. ‘별유천지라 이름한 분경인데 석부작이 주 소재로 쓰였다. 석부작에 부착된 식물들이 고사하며 자주 보식해야 했다. 이끼로 마무리하고 물을 주었더니 아름다움이 되살아났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돌볼 참이다. 결자해지 차원이다.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정원석이며 나한상에 물을 준다. 그래선지 돌에다 물을 주면 돌이 크나요?’ ‘돌에 왜 물을 주나요?’ 하는 질문을 자주 듣는다. 묻는 이의 태도에 따라 답변이 달라진다. 건성이면 쌓인 먼지를 씻어주는 것으로, 진지하면 돌에다 세월을 입힌다며 설명이 길어지곤 한다.

 

수석에서 물을 주는 것을 두고 양석(養石)이라 한다. 돌을 기를까만 오랫동안 물을 주게 되면 돌갗에 기품과 아취가 풍기게 된다. 양석보다는 숙석(熟石)이라 보면 되겠는데, 그 맛을 아는 사람은 안다.

 

이곳에서의 생활도 사반세기라는 25년이 지나고 보니 변화한 것이 많다. 장년이었던 나는 노인이 되었고, 나무는 아름드리로 자랐고, 조경석이며 정원석엔 세월이 들어앉았다. 얼굴에 돋아난 검버섯, 나무와 돌에 피어난 이끼 등 노태가 역력하다.

 

일찍이 조지훈 선생은 돌의 미학이란 글에서 돌의 맛-그것도 낙목한천의 이끼 마른 수석(瘦石)의 묘경을 모르고서는 동양의 진수를 얻었다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라는 글자 속에는 모르긴 해도 늙음이 숨어 있다 하겠다. 태비(苔碑)는 오래된 비석을, 태석(苔石)은 오래된 돌을 일컫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도 늙으면 태인(苔人)이라 부를 만도 하겠다. 나처럼 늙어 검버섯이 돋아나기에 하는 말이다. 태인을 들먹인 것은 늙음의 미학을 말함이지, 노태(老態)의 쓸쓸함과 서글픔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친구에겐 이끼로 된 이끼 방석을 보냈다는데, 이끼처럼 변치 말자는 다짐이었다. 이끼 방석을 일러 태인(苔因)이라 한다.

 

 

지난 주말에 문경에서 열린 2019 한국난대전에 다녀왔다. 거기서 차익현 형을 만났다. 서울 근교에서 아침 일찍 손수 차를 몰고 왔단다.

 

그를 보면서 노익장이란 말이 생각났다. 그는 올해 86세다. 그와의 만남이 얼추 40년을 헤아리게 되었다. 과천에서 능곡재를 열었을 때 한양난원을 경영하던 그로부터 적잖은 도움을 받았다.

 

전시장에서 두어 시간 함께하는 동안 몇 차례나 내려놓기를 강권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나니까 편안하기 그지없단다. 그가 말하는 것은 방하착(放下着)’이었다.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욕망과 집착을 모두 내려놓음으로써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방하착이다.

 

한 스님이 탁발(托鉢)을 위해 험한 산길을 가는 도중 사람 살려하는 절박한 비명이 길 아래에서 들려왔다. 놀라 밑을 내려다보니 어떤 사람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애타게 고함을 치고 있었다.

 

스님이 황급히 다가가자 인기척에 나는 소경입니다. 발을 헛디뎌 이렇게 되었으니 제발 좀 살려주시오하고 애원했다. 다가가 보니 매달린 이는 땀에 젖어 사색인데 다행히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는 키높이 정도였다.

 

안심한 스님은 손을 놓으시오. 떨어져도 괜찮으니 걱정 말고 손을 놓으시오하고 외쳤다. 그러자 손을 놓으면 벼랑으로 떨어져 죽는데 어찌 손을 놓으란 말입니까? 제발 좀 살려주시오하고 목이 메어 거듭 애원하는 것이었다. “살고 싶으면 당장 손을 놓으시오하고 스님이 외쳤으나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더 이상 못 버틸 시각에 손을 놓아버렸다. 그러자 땅에 툭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시각장애인은 졸지간에 있었던 일을 비로소 깨닫고 땀을 닦으며 멋쩍게 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 떠났다.

 

수행자들이 흔히 화두에 올려놓고 즐겨 주고받는 방하착이란 설화(說話). 스님들이 출가할 때 행하는 인연 끊기의 첫 번째가 바로 방하착의 실천이다.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 고뇌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삭발할 자격이 없고, 당연히 스님이 될 수 없다. 출가한 스님들도 어렵다는 방하착, 사바세계의 중생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인간은 누구나 욕망으로 산다. 무엇인가 하고 싶어 하고 무엇인가 갖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이 인간의 존재 이유가 되고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부며 권세며 명예며,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방하착이 어찌 물질만 뜻하리오.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사람에 대한 원망, 분노, 증오, 성취에서 얻은 오만함도 다 내려놓으라는 가르침이다.

 

86세의 차익현 형의 얼굴엔 화기가 넘쳤다. 욕심으로 찌들은 내 얼굴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귀갓길에서 버리기로, 내려놓기로 다짐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다짐했다.

 

버리고 나면, 내려놓고 나면 봄비 맞은 청태처럼 되리란 생각에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이끼가 곧 방하착임을 아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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