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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보 칼럼> 백락(伯樂)과 지음(知音)
기사입력  2019/08/04 [03:44]   이성보 거제자연예술랜드 대표

 

인터넷蘭신문 '난과함께'는 한국의 역사와

애란인의 역사를 기록 보존합니다.

 

▲ 풍란 '삼각모단' 기화    

 

백락(伯樂)과 지음(知音)

 

어느 사이에 나이가 이순(耳順)의 중반이 되었다. 성현은 들리는 소리가 모두 순조로웠다고 하는데, 그 시대보다 질서가 훨씬 나아진 지금이련만 아직 철이 덜 났는지 들리는 소리가 까스롭기만 하다.


신묘년 벽두에 동장군의 맹위가 절정이다. 따뜻한 남쪽나라라는 이곳 거제에서도 관측 이래 최고를 기록한 추위이고 보면 이제 어지간한 추위는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이다.

 

춘란이 자생하는 작업장 뒷산에 올라 행여 춘란의 꽃대가 얼지나 않았는지 쌓인 낙엽을 헤치고 가만히 살펴보니 말짱했다. 혹한도 아랑곳 하지 않는 의연한 춘란의 기개에 외경을 느꼈다.

 

눈뜨면 살다시피 하는 작업장은 비닐 한 겹을 둘러친 비닐하우스이다. 비닐하우스 속의 식물들이 용케 추위를 견디었는지 여기저기에 숨 고르는 생명이 보였다. 다소곳 고개를 내민 넉줄고사리와 세뿔석위의 새싹이다. 이 혹한에 새싹이라니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겨울이 오면 / 어이 봄이 머지 않으리…, 쉘리가 노래하지 않아도 겨울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란 말이 실감났다.


아니 끝이니 시작이니 하는 것은 애당초부터 없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항구(恒久)하는 것이란 있을 수 없고 생성과 쇠멸이 반복되는 것이 자연의 질서이고 보면 계절의 순환 또한 질서 속의 작은 단락일진데 거기에 무슨 시말(始末)이 있으리오.

 

성냥알갱이만한 새싹을 바라보는 도중 이곳에서 보낸 18년 세월이 주마등 같이 스치었다.

나는 오랜 세월 신산을 겪으면서 때를 만나지 못했다고 탄식해왔다.

 

신묘년엔 무슨 일을 낼 것 같은 예감에 ‘자기를 알아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자기가 먼저 남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해야 된다(不患不知己 患不知人也)’는 공자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마음을 추스린다.

 

기회에 당나라의 문장가로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의 ≪ 잡설(雜說)≫을 음미해 보기로 하자.

 

세상에는 백락(伯樂)이라는 사람이 있은 연후에 천리마가 있다. 천리마는 언제나 있어 왔으나 말을 잘보는 눈을 가진 백락은 언제나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상엔 비록 명마가 있다 해도 주인을 잘못 만나면 노예의 손에서 욕이나 당하며 말구유와 마굿간 사이에서 그냥 죽게 되어 천리마라는 이름을 얻어듣지 못했던 것이다.

 

천리를 가는 말은 한 끼에 한 섬의 곡식을 먹는데도 말을 기르는 자가 천리마인지도 모르고 양을 적게 먹인다면 그 말이 비록 천리를 능히 달리는 기능과 주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배가 고프고 힘이 부족해서 그의 재질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보통말과 같이 취급되어 자기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으니 어찌하여 능히 천리를 가겠는가. 매질을 함에 있어서 함부로 하며 먹이도 제대로 주지 못하고, 울어도 그 뜻을 알아주지 못하고 채찍을 잡고 말에 다가가서 말하기를 세상에 좋은 말이 없다 하니 슬픈 일이로다. 그렇다고 참으로 천리마가 없겠는가. 그것은 진정 말을 알아보는 눈이 없어서 그럴진저.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살펴보면 참으로 그렇다. 아까운 인재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마는 경우를 허다하게 볼 수 있다. 이 일은 비단 오늘날에만 있는 일이 아니고 한유가 ≪잡설≫을 쓰기 그 훨씬 이전에도 무수히 있어 온 사실이다.

 

때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바로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는 얘기와 상통한다. 타고난 자기의 기능과 소질을 살리고 발휘하려면 그를 발굴해서 키워주는 사람, 즉 후원자가 있어야 한다.

 

성인과 현인의 경우도 그러하다. 성현이 때를 만나지 못함을 불우하다 한다. 성현의 그 시대는 불우하였으나 자기를 따르는 현제자를 만남으로서 빛이 이어져 갔다.

 

석가와 가섭, 공자와 안회, 예수와 베드로가 그렇다. 지기로서는 한산(寒山)과 습득(拾得),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 추사(秋史)와 초의(草衣)?다산(茶山)과의 만남이 그러하다.

 

머잖아 3월이면 백화경염의 난전시회가 경향 각지에서 봇물을 이룰 것이다. 난을 보는 눈은 말할 것도 없고 진실된 난우를 가려내는 눈도 가져야 하리라.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하지 않던가. 멀리 보는 눈을 천리안이라 하고 사물을 밝게 보는 눈을 명안이니 혜안 혹은 법안이라고도 한다.

 

사람을 알아보고 그를 발굴하는 고견과 능력을 갖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나를 충심으로 알아주는 난우가 있다면 그의 삶은 이미 절반은 성공한 삶이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으리라.

흰 토끼해라 하는 신묘년엔 온 세상이 소심처럼 해맑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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