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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조 칼럼> 기자에몬이도와 한국춘란
기사입력  2021/03/10 [03:51]   정계조 국제동양란교류협회 회장

 

 "한국난계 變해야 산다"

 인터넷蘭신문 '난과함께'는 한국난역사 기록보존관에

 전국대회 10곳의 수상작품 기록보존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2021.3.9일 현재 사이버전시회에 6.300점을 전시중입니다)

 

 

기자에몬이도와 한국춘란

 

2006년 가을, 국제동양란교류협회주최주관으로 1회 국제동양란명품대회(일명 G4대회)’가 부산 강서체육관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동양란의 국제대회로서는 처음이고, 한국중국일본대만 난인들의 큰 관심과 성원 속에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그 당시 한국중국일본대만의 난 시장에서 단연 인기품은 한국춘란 엽예품이었다. 이 대회 또한 가을 엽예품 대회이고 더구나 한국에서 개최되다보니 단연 한국춘란 위주의 대회가 되었다.

 

처음으로 개최되는 동양란국제대회이므로 대회준비위원회 측에서는 명실상부한 국제대회의 위상을 갖추기 위해 여러 가지로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대회준비위원장을 맡은 나는 대회 홍보책자를 구상하면서 떠 올린 것이 기자에몬이도였다. ‘기자에몬이도사진을 표2(표지 안쪽 면)에 싣고 설명을 달았다. 많은 난인들이 왜 난()행사에 차사발을 올렸느냐고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몇몇 난인은 그 의도를 알고 대단한 발상이라고 고개를 끄떡였다.

 

기자에몬이도는 이름도 모르는 조선의 사기장이 만든 조질백자(분청사기) 정호다완(井戶茶碗, 이도다완, 차사발)이다. 분청사기는 고려청자에서 조선백자로 넘어가는 중간시기(14C~16C)에 만들어진 것으로 청자에 분칠을 한 것 같은 형태의 그릇이다. 분청사기는 기교가 배제되고 자연미와 소박미가 돋보인다.

 

 

분청사기에도 차사발이 몇 종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으뜸은 정호다완이다. 정호다완은 현재 60개정도가 현존하고 있으며, 모두 일본에서 소장하고 있고 한국에는 하나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호다완 중에서 천하제일의 명품 차사발이 기자에몬이도이다.

 

16C경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국보(26)가 된 다완 이다. 정호다완은 조선의 차인들이 그 진가를 잘 모르고 있는 사이 일본에서 그 아름다움과 예술적 가치를 알고 다 가져간 것이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차 선생인 센노리큐는 조선의 차사발에 꽂혀 광적으로 수집하기에 이른다.

 

일제 강점기 한국의 민예품에 빠진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를 두고 조선의 잡기에서 미를 발견하여 천하의 명물로 승화시킨 일본인들의 심미안이 위대하다고 했다. 참으로 비참하고 슬프기 짝이 없는 일이다.

 

 

기자에몬이도는 그릇의 높이가 9.1, 지름 15.3~15.5, 무게 370g인 조그마한 차사발이다. 예술적 눈높이가 지고한 사기장이 가슴에 자유혼을 가지고 본능적 창조정신을 발휘하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든 것이다.

 

사기장 신한균무위(無爲)처럼 보이나 무위가 아닌 인위를 통해 무위적 아름다움, 즉 자연미를 그대로 표현한 창조적 장의 정신의 결과라고 했다. ‘기자에몬이도는 현재 일본의 대덕사 고호암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 가치는 수천억이 된다고 한다. 한국인이 이를 한번 보고자 신청하면 볼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를 체크하고, 보는 댓가로 50만엔을 내야한다.

 

내가 1회 국제동양란명품대회홍보책자에 기자에몬이도를 실은 것은 동양4국의 난인들에게 한국춘란에 대해 몇 가지를 인식시키고자 하는 나름대로 의도가 있었다. 우선 한국춘란이 조선다완 못지않게 국제적으로 우수한 자연 문화상품이라는 점과 한국춘란은 조선다완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때 이미 한국춘란 명품이 일본으로 많이 건너갔고, 계속해서 가져가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시기였다. 난 명품을 국가 간에 서로 교류하여 키우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나 양국의 난인들이 그 진가를 알고 거래해야하고, 그 근본과 가치를 알고 키워야한다는 뜻이었다.

 

한국 춘란은 그것이 어디에 있든 누가 소장하든 한국춘란이며, 그 진가는 한국의 난인들이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한국춘란 명품을 원종채로 일본에 더 이상 넘게 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고, 이미 원종채로 넘어간 한국춘란도 반드시 찾아와야 한다는 뜻을 담았다.

 

이러한 뜻이 반영되었는지 몰라도, 그 후 지금까지 한국의 난인들은 한국춘란 명품을 대부분 찾아와 잘 보존 하고 있다. 도자기와 달리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중국 난의 역사는 천년이고 일본춘란의 역사는 백년으로 본다. 반면에 한국춘란이 채집되어 재배하기 시작한 시기는 1980년대 초반이다. 그전에도 일부 극소수의 난인들이 난을 배양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주로 중국일본 난을 소장하고 배양하였다.

 

1980년도 중반 이후, 한국춘란의 채집에 열을 올리게 된 것도 한국춘란 산채품(주로 엽예품)이 일본으로 수출되면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 당시 이해성, 추본흥, 선건희 등 몇몇 상인을 통하여 해마다 상당히 많은 난()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제일교포이면서 부산에 거주하던 이해성은 본격적으로 한국춘란 엽예품을 모아 일본으로 건네는 창구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부산의 송길현, 서울의 박상길 등 한국춘란을 본격적으로 수집하는 애란이 나타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내에서도 한국춘란을 하는 난인의 증가와 함께 한국춘란 엽예품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한국춘란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춘란으로 둔갑하였다. 이때만 해도 일본춘란이 인기가 있고 한국춘란을 알아주지 않을 때이다. 그러다가 한국춘란의 우수성이 알려지고, 국내외에서 한국춘란을 수집하는 애란인이 늘어남에 따라 한국춘란의 값이 오르게 되었다. 마침내 일본인들은 자기들이 소장하던 한국춘란을 일본춘란과 차별화하였고, 높은 값에 한국에 도로 팔기에 이르렀다.

 

수년 동안 무수히 일본으로건너간 난()1993년과 1994년의 살인적인 더위에 많이 죽었다. 일본에서도 한국춘란의 배양성에 대해서 한 때 회의를 느껴 한국춘란을 가져가는 것을 주춤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 한국춘란에 대한 인기는 식을 줄 모르고 여전히 좋았으며, 그 여파로 일본에서도 다시 붐이 일기 시작했다. 더구나 1997IMF 외환위기가 터지자 엔화의 환율이 올라 한국춘란 고급품 위주로 상당량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사람들이 의아하게 여긴 것은 명품 수준의 난을 다 가져갔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서 끊임없이 명품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국내에 산채인 위주의 취미인들이 급속하게 늘어났는데, 이들은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명품은 잘 팔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2000년대 접어들면서 한국에서도 명품에 대한 많은 수요가 있었고, 일본과 대등한 가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지속적인 국내 난인들의 춘란에 대한 애착과 선호로 산채품의 공급이 모자라 중국춘란 무향종이 수입되었고, 일본으로 건너갔던 한국춘란이 다시 돌아오기에 이른다.이 과정에서 한국춘란은 모두가 자기 국적을 되찾게 되었고, 오히려 일본춘란이 한국춘란 가품으로 둔갑하기까지 하였다.

 

품종에 따라서는 일본에서 번식이 많이 되어 수십 배에 이르는 가격으로 사오기도 하였으나 원예화에 실패한 난()과 죽어 없어진 난을 감안해 보면, 일본도 별로 이득을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국내의 난인들이 한국춘란 문화를 잘 가꾸고 발전시킴에 따라 한국춘란을 꾸준히 찾아왔으며, 2015년에 이르러서는 한국춘란을 거의 다 찾아 올 수 있었다.

 

그리고 더욱 다행인 것은 한국춘란 가격이 일본춘란보다 훨씬 비싸게 형성됨으로써 일본춘란으로 둔갑되지 않고 일본에서도 한국춘란으로 명명되어 보존 되어 왔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국춘란 중투 신문’ ‘사천왕’ ‘고려보’ ‘금강보’ ‘진주성’, 한국춘란 단엽복륜 신라등이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되기까지는 국내의 난인들이 한국춘란에 대한 사랑과 한국춘란 문화의 창달과 융성에 대한 사명감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한국의 난인들이 한국춘란을 여타 다른 난()과 차별화하고 한국춘란을 끝까지 고집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다. 이것 또한 일본에서 한국춘란을 일본춘란으로 둔갑시키지 못하게 되었던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차사발은 우리의 우수한 문화임에도 이를 알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는 사이 일본이 가로채 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을 일본에서는 도자기전쟁이라고도 한다.

 

전쟁을 일으킨 데는 도자기를 수탈해 가려는 속셈이 있었고, 실제로 그들은 조선의 도자기와 함께 조선의 사기장들을 데리고 갔다. 일본에서는 이렇게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도 조선에서는 이름조차 붙이지 못하고 그냥 막사발이라고 하면서 그 진가를 몰랐던 것이다.

 

우리의 땅에서 우리의 조상이 만든 것임에도 그 진가를 몰랐기에 우리는 한 점도 갖지 못하고 있다. 아쉬워한들 돌이킬 수 없다. 우리 조상의 다완 만드는 솜씨에 절로 고개 숙이게 되고, 이를 지키지 못한 후손들이기에 한심하고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그 뿐만 아니다. 문화를 빼앗기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알게 하는 또 한 실례를 보면, 불행하게도 우리는 중국, 베트남, 조선만이 가지고 있던 최첨단 백자기술을 임진왜란 때 일본에 넘겨주었고, 우리는 그것을 산업화 하지 못했다.

 

이후에 우리는 한국중국일본 중 도자기와 차문화에 가장 무관심한 국민이 되었고, 한동안 차문화의 맥이 끊기기에 이른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끌고 간 사기장을 통해 백자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고, 백자기술이 없던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여 선진국 진입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조선에서 가져간 사발을 명품 차사발로 대접하며 그 사발로 차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이런 것을 보면 문화 하나가 그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현재 일본 전역에 심겨 있고, 우리나라에도 해마다 벚꽃축제를 열고 있는 진해 벚나무는 그 원조가 제주도 한라산이거나 아니면 해남의 두륜산과 대둔산에서 자생하던 벚나무들이다. 벚나무의 한 종류인 왕벚나무는 순수 한국 토종이다.

 

이 왕벚나무들을 일찍이 일본인들이 몰래 가져가서 후지산의 산벚나무와 교잡을 시켜 만들어 낸 것이 후지사꾸라란 품종이다. 후지사꾸라는 꽃잎이 흰빛을 띠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유달리 화사함으로 현혹시키지만 원래의 모종(母種)인 왕벚나무의 꽃색은 연분홍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확연히 알 수 있는 연분홍빛이 나타난다. 연분홍빛은 흰빛보다 은근함을 주어서 오래도록 꽃색에 취하게 하여 싫증이 나지 않는다.

 

1943428일 우리나라 임시정부 수립 24주년 기념식을 아메리카대학교에서 가졌는데, 이때 이승만 박사가 포토맥 강가에서 기념식수한 나무가 우리나라의 토종 왕벚나무이다.

 

많은 사람들이 벚꽃을 일본의 국화로 알고 있지만 일본인이 좋아하고 일본 전역에 많이 심겨져 있을 뿐 일본국화는 아니다. 일본에서는 국화(國花)를 법으로 정하진 않았으나 엄밀하게 따진다면 왕실에서 정하고 있는 국화(菊花)를 국화로 보는 것이 옳다.

 

종전에는 진해에서만 벚꽃축제를 하던 것이 지금은 우리나라 각지에서 나름대로 벚꽃축제를 벌이고있다. 늦은 감은 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보다 더 왕벚나무의 특성을 잘 살리고 잘 가꾸어서 자연문화상품을 만들어 세계 사람들이 벚나무하면 한국을 떠 올리게 했으면 한다.

 

튜립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 카스피해 주변이다. 야생 튜립이 많은 터키는 튜립을 국화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튜립을 산업화한 나라는 네덜란드이다. 한 때 네덜란드에서는 튤립투기로 온 나라가 혼란스럽기까지 했지만 이를 멋지게 산업화함으로써 국가산업에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우리는 우수한 우리의 한국춘란을 하루속히 원예화하고 난문화를 대중화하고 산업화해야 할 것이다. 국제적인 난문화 행사와 한국춘란의 국제교류를 통하여 한국춘란을 국제 난문화 상품으로 만들어 국내외 수요를 늘려야 할 것이다.

 

또한 빠른 번식을 통하여 가격을 낮춤으로써 손쉽게 선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현재 외국난으로 축하 선물하는 것을 하루속히 한국춘란으로 바꿔야할 것이다.

 

집집마다 아파트 베란다에 한국춘란 몇 분씩 키우면서 가족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자연스레 이어지도록 하여 대중화하고, 산업화의 기반을 조성하여 농가소득과도 직결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수한 한국춘란도 있고, 길도 있는데 난인들의 지혜와 열의만 있으면 되겠다. 깨달음에 그치고 행동하지 않으면 세상을 바꿀 수 없는 이치를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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