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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보 칼럼> 노근묵란도(露根墨蘭圖)
기사입력  2017/01/16 [11:44]   거제자연예술랜드 대표 능곡 이성보

인터넷신문 난과함께는

2015.5.1일 창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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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묵란도(露根墨蘭圖)

난은 공자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넘어오던 중 은곡(隱谷)이라는 골짜기에서 발견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외진 골짜기에서 문득 맑은 향기를 발하는 풀 한 포기를 발견한 공자는 탄식하며 "너는 왕자의 향을 지녔건만 어찌 이름도 없이 잡초 속에 묻혀 있느냐?"라고 한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때 공자는 많은 제자를 데리고 10여 년 동안 중원 천하를 주유하면서 뜻을 펴려고 했지만 기회를 얻지 못했다. 무성한 잡초 속에 묻혀 맑은 향을 뿜고 있는 한 떨기 난은 때를 만나지 못한 '불우한 군자'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난의 향기와 고귀함에 대한 찬미는 전국시대 초나라 시인 굴원으로 부터 비롯되었다. 그의 시 '이소'에서 고결함과 충성됨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난을 애호하는 마음은 후에 필묵으로 난을 그리는 묵희(墨戱)로 발전하여 흉중일기로 표현하는 방편으로 문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이러한 풍조는 북송대의 소동파에 의해 고취됐으며, 시 · 서 · 화 일체사상과 더불어 문인화론의 근간을 이루었다.

 

한편 난송이 망하고 나라가 몽고족인 한 나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자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은둔생활을 하는 문인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때까지 대부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학문을 연마해 왔던 사대부들은 원의 과거제 폐지로 정치를 떠나 시와 서화의 세계에 몰입하면서 망국의 한을 달랬다.

 

난세의 정신을 난으로 구현한 대표적인 인물이 정사초(1241~1318)이다. 그는 본래 유학자이지만 원나라에 의해 송이 멸망하자 벼슬길을 포기하고 강남지방을 떠돌며 유랑생활을 했다. 도교와 선에 심취하기도 했으며, 태극제련내법과 같은 도교경전을 저술해 도교의 은둔생활을 비판하는 한편, 가을국화를 보며, "차라리 가지 끝에 향기를 머금은 채 죽을지언정 어찌 북풍에 휘말려 꽃잎을 떨구겠는가"하는 비분강개한 시를 쓴 애국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송나라가 망한 뒤에 쑤저우(蘇州)에 은거하며 이름을 사초라고 고쳤다. 송나라 왕가의 성인 '조(趙'에서 초(肖)를 취해 송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끝까지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자호인 소남의 숨은 뜻도 자리에 앉거나 누울 적에도 반드시 원나라가 점령해 있는 북쪽을 등지겠다는 겸연한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사초는 묵란을 잘 쳤는데 난의 뿌리를 그리지 않았다.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물으니, "국토가 남에게 빼앗기고 말았는데 뿌리 내릴 곳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묵란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그였기에 소문으로 정소남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원나라의 장수가 묵란화 한 폭을 청했던 모양이다. 완강히 몇 차례나 거절하였으나 끝내는 그려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정소남은 이제까지 그려오던 묵란화가 아닌 허공 중에 뿌리를 모두 드러내 놓고 있는 난을 그려 내던지듯 건네주었다고 한다.

 

또 원나라의 지방관이 그에게 그림을 청했을 때 단호히 거절하면서, "내 머리는 얻을 수 있어도 내 그림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일갈했다는 일화도 전해오고 있다.

 

그가 그린 '묵란도'는 뿌리를 드러낸 난(露根蘭)의 잎과 꽃을 간일한 필치로 그린 그림이다. 중앙의 꽃을 중심으로 잎이 양쪽으로 뻗어나가는 대칭구도를 보이고 있으며, 여벽에는 화제가 써있다.

 

서화를 심화(心畵)라고 한다면 정사초가 난을 그릴 때 지면을 그리지 않는 것은 화의(畵意)가 난의 실상 표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망국한을 난을 통해 표현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린 묵란도 중 어떤 것은 의지할 곳 없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망국의 설움을 상징해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한다. 묵란도에서 뿌리를 그리지 않은 것은 뿌리내릴 흙이 없다는 것이고, 흙이 없다는 것은 국토가 이미 외적에 의해 강탈당했다는 숨은 뜻을 나타낸 것이다. 즉, 나라를 잃은 사람은 뿌리 없는 난과 같이 비바람에 시달리지 않아도 시들고 만다는 생각을 그림에 담은 것이다.

 

그는 뿌리 없는 난을 그림만큼 망국의 깊은 슬픔을 금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망국의 아픔이 녹아있고 절조가 잘 반영된 정사초의 '묵란도'는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어 그의 성가를 높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민영익의 노근묵란도가 유명하다. 민영익은 조선 말기의 문신 · 개화사상가  · 예술인으로서 명성황후의 친정조카다. 황후의 비호 아래 일약 세도가 민씨 문중의 총아가 되었다. 약관 20세에 이조참판이 되었고, 26세에 병조판서 및 한성관윤을 지내면서 한말의 정국을 주도해 나갔으나, 임오군란으로 생부가 살해되고, 갑신정변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격동기를 살면서 많은 어려움과 고초를 겪은 운미(芸楣) 민영익은 1894년 홍콩과 상해 등지로 망명하게 되었다. 이후 수차례 귀국과 망명이 이어지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민황후가 무참히 살해되자 그날로 모든 것을 잃고 상해에 정착한 민영익은 55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술과 그림으로 한 서린 세월을 보냈다. 그는 특히 묵죽과 묵란에 뛰어나 상해 예원서 이름을 크게 떨쳤으며, 조선의 난초광인이라 불리었다.

 

그는 노근란을 많이 그렸는데 그 이유는 나라를 잃으면 난을 그리되 뿌리가 묻혀 있어야 할 땅은 그리지 않았다는 정사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난 그림은 대체로 여백이 적은 편인데, 조국을 잃어번린 한이 서린 그림으로 화폭에 담긴 뜻이 그지없이 애절하지만 난 만은 오히려 위풍당당하기조차 하다. 이 그림은 당시 유행하던 대원군의 석파란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그는 주로 붓끝이 획의 가운데에 위치해 필획의 모양이 둥근 감이 나고 두께가 거의 일정한 장봉획을 구사했는데, 이는 다른 이의 작품과 구분되는 것으로 전통의 흐름에서 볼 때 확연히 이탈하여 국내에서는 스승을 찾기 힘들다. 상해 시절에 교우했던 오창석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면 왼쪽 아래에 찍혀있는 화가 자신의 백문방인(白文方印) 민영익인 외에도 화면 곳곳에 안중식, 오세창, 이도영, 최린의 후기찬문이 빽빽하게 쓰여 있다.

 

한때 소년 재상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그런 기개가 충만한 듯한 운미의 난법은 우리 예술 감각의 특징인 호방하면서도 굳세고 바른 특성을 살려 건란을 힘차게 뽑아내었다. 여러 무더기의 난들은 심은 놓은 작대기같이 꿋꿋한 잎이 주가 되어 웅건하고, 쾌활하고 중후하면서 꿋꿋한 난을 창조해 낸 이 그림은 가히 신품(神品)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난은 전통적으로 유교의 이상적 인격의 상징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정사초나 민영익의 손에 의해 뿌리를 덮은 흙이 제거됨으로써 난은 '망국의 설움'이라는 새로운 문화상징으로 바뀌었다. 정사초와 민영익의 난은 전통적인 유교의 인습에서 벗어나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차가운 현실 인식으로 담글질해 이루어졌다. 그래서 독특한 분위기가 감도는 그들의 노근묵란도는 나라 잃은 시대의 지식인이 가져야 할 사명감을 일깨워 그 시대를 대표하는 명작으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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